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 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시구 분석
1. 쫓아오던 햇빛인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 햇빛을 좇아 지금까지 노력해 왔건만 정작 그 햇빛은 저 높이 뾰족하게 솟아 있는 교회당의 탑 꼭대기에만 비치고 있습니다.
2. 첨탑이 ~ 올라갈 수 있을까요: 목마르게 추구해 오던 햇빛이 존재하는 곳이 너무 높고 뾰족해 도저히 올라갈 수 없다는 인식입니다. 현실적인 상황이 너무 극한적이어서 결코 일상적인 방법으로는 광명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가 불가능함을 의미합니다.
3. 종 소리도 들려 ~ 불며 서성거리다가, :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알면서도 햇빛, 즉 참된 삶을 포기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고뇌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을 형상화하였습니다.
4. 괴로웠던 사나이,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갈등과 방황의 끝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그 길이란 바로 지금 햇빛이 비치고 있는 십자가에 '내'가 매달리면 된느 것이요, 그러기 위해서는 인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5. 모가지를 드리우고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기꺼이 한 목숨 바쳐 희생함으로써 이 어둡고 암울한 시절을 밝힐 수 있는 꽃을 피우겠다는 다짐입니다.
■ 작품 해설
이 시는 윤동주의 종교관과 역사관, 인생관이 잘 나타난 작품으로, 시대 상황에 대한 윤동주의 투철한 인식과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강한 염원이 드러나 있으며, 그러한 염원을 이루기 위한 자기 희생의 속죄양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이런 자기 희생은 작게는 자신의 부끄러운 삶을 정화시키는 일이며 크게는 우리 조국의 광복이라는 더 큰 의를 실현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개인적인 구원이자 동시에 민족적인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 작품은 민족의 역사가 희생을 요구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정신을 본받아 기꺼이 몸을 십자가에 매달겠다는 순절 정신과 민족의 속죄양이 되겠다는 자기 희생정신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모가지'는 '목'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서 시적 화자가 자신의 희생적인 죽음을 겸손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희생이란 다른 사람을 위해서나 의를 위해서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즉 자랑하거나 내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희생에는 필연적으로 겸손함이 따르는 것입니다. 마지막 행의 '죠용히'도 겸손함이 담긴 시어입니다. 즉 광복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단호하면서도 겸손한 어조로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육사의 <광야>에 나오는 '가난한 (노래의 씨)' 라든지,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에 나오는 '작은 (등불)' 등의 시어도 이와 같은 성격의 시어들입니다.
이 작품에서 '십자가'는 관습적인 상징과 창조적인 상징을 동시에 지닙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죽음', '예수 그리스도' 등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이러한 관습적 상징 외에도 문맥적으로 새로운 상징적 의미를 획득하고 있는데, 그것은 '시적 화자가 도달하기 어려움을 절실히 느끼면서도 동경하여 마지 않는 종교적 또는 도덕적 생활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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