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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분.국

치숙_채만식(핵심정리)

  나는 죄선(→조선) 여자는 거져 주어도 싫어요.

  구식 여자는 얌전은 해도 무식해서 내지인하구 교제하는 데 안 됐고, 신식 여자는 식자가 들었다는 게 건방져서 못 쓰고, 도무지 그래서 죄선 여자는 신식이고 구식이고 다아 제바리여요.

  내지(→일본) 여자가 참 좋지 뭐. 인물이 개개 일자로 예쁘겠다, 얌전하겠다, 상냥하겠다, 지식이 있어도 건방지지 않겠다, 좀이나 좋아!

  그리고 내지 여자한테 장가만 드는 게 아니라 성명도 내지인 성명으로 갈고, 집도 내지인 집에서 살고, 옷도 내지 옷을 입고, 밥도 내지식으로 먹고, 아이들도 내지인 이름을 지어서 내지인 학교에 보내고..... 철저하게 친일파로 살면서 부를 축적하려는 인물의 왜곡된 가치관이 드러나 있습니다.

  내지인 학교라야지 죄선 학교는 너절해서 아이들 버려 놓기나 꼭 알맞지요.

  그리고 나도 죄선말은 싹 걷어 치우고 국어(→일본어)만 쓰고요.

  이렇게 다 생활법식부터도 내지인처럼 해야만 돈도 내지인처럼 잘 모으게 되거든요.

  내 이상이며 계획은 이래서 이십만 원짜리 큰 부자가 바로 내다뵈고 그리로 난 길이 환하게 트이고 해서 나는 시방 열심히 길을 가고 있는데 글쎄 그 미쳐 살기든 놈들이 세상 망쳐 버릴 사회주의 하려 드니 내가 소름이 끼칠 게 아니냐구요? 말만 들어도 끔찍하지! → 사회주의는 빈부 격차 해소라는 근본적인 사회 개혁을 추구하는 이념이기 때문에 부자가 되려는 야망에 가득 차 있는 '나'에게 있어 사회주의는 위협적인 세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채만식의 <치숙>은 단편 소설, 풍자 소설입니다.

 사실적이고 풍자적입니다.

 부정적인 인물이 자신의 왜곡된 가치관을 스스로 폭로하여 풍자적 효과를 얻고 있습니다.

 대화 문체를 구사하여 '나'와 '아저씨'와의 의식상의 괴리를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1인칭 관찰자 시점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서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일제에 순응하여 부를 축적하려는 부정적 인물에 대한 풍자'가 이 소설의 주제입니다.


  "아저씨?"

  "왜 그러니?"

  "아저씨가 여기다가 경제 무어라구 쓰구 또, 사회 무어라고 썼는데, 그러면 그게 경제를 하란 뜻이오, 사회주의를 하란 뜻이오?"

  "뭐?"

  못 알아듣고 뚜렷뚜렷해요. 자기가 쓰고도 오래 돼서 다아 잊어버렸거나, 혹시 내가 말을 너무 까다롭게 내기 때문에 섬뻑 대답이 안 나왔거나 그랬겠지요. 그래, 다시 조곤조곤 따졌지요.

  "아저씨! 경제란 것은 돈 모아서 부자 되라는 거 아니오? 그런데 사회주의란 것은 모아 둔 부자 사람의 돈을 뺏어 쓰는 거 아니오?" → 경제학과 사회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무지함이 드러나 있습니다. 또한 '나'의 관심사는 오로지 돈을 모으는 것이라는 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애가 시방!"

  "아아니, 들어 보세요."

  "너, 그런 경제학, 글너 사회주의 어디서 배웠니?"

  "배우나마나, 경제란 건 돈 많이 벌어서 애껴 쓰구 나머지 모아 두는 게 경제 아니오?"

  "그건 보통, 경제한다는 뜻으로 쓰는 경제고, 경제학이니 경제적이니 하는 건 또 다르다."

  "다른 게 무어요? 경제는 돈 모으는 것이고 그러니까 경제학이면 돈 모으는 학문이지요?"

  "아니란다. 혹시 이재학이라면 돈 모으는 학문이라고 해도 근리할지 모르지만 경제학은 그런 게 아니란다."

  "아아니 그렇다면 아저씨, 대학교 잘못 다녔소. → 부정적 인물이 긍정적 인물을 비판하는 내용 경제 못 하는 경제학 공부를 오 년이나 육 년이나 했으니 그거 무어란 말이오? 아저씨가 대학교까지 다니면서 경제 공부를 하구두 왜 돈을 못 모으나 했더니, 인제 보니깐 공부를 잘 못해서 그랬군요!"

  "공부를 잘 못했다? 허허. 그랬을는지도 모르겠다. 옳다, 네말이 옳아!" →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진보적 지식인의 자조 섞인 한탄이 반어적으로 표현된 구절입니다.


  이 소설은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옥살이를 하고 나온 인물의 좌절을 무지한 조카의 눈으로 포착하여 묘사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부정적 인물이 긍정적 인물을 비판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나'는 철저한 친일적 인물로 오로지 부를 축적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고, '경제학'이나 '사회주의'의 진정한 의미도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이러한 인물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다 일제의 탄압을 받고 있는 '아저씨'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작가는 겉으로는 '나'의 생활 방식을 긍정하고 '아저씨'의 비현실적인 사고방식을 부정하고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나'의 이기주의를 비판하고 '아저씨'를 긍정하는 풍자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작품은 속어와 비어를 많이 사용하여 사실성을 높이고 있으며, 판소리 사설의 문체 사용으로 해학성과 풍자성을 살리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나'가 '아저씨'에 대해 이야기하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독자는 '나'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철저하게 친일적 인물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재산을 축적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부정적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독자는 '나'의 말에 의심을 하면서 오히려 '아저씨'의 삶에 더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 작품은 이처럼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인 '나'가 긍정적 인물인 '아저씨'를 비판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일제 식민지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풍자를 통해 나타내는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채만식은 <치숙>에서 '나'의 생활 방식을 칭찬하고 '아저씨'의 사고방식을 비난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나'의 생활 방식을 은근히 비판하면서 '아저씨'의 입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채만식은 일베 강점기의 부정적인 인물을 풍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가 채만식은 흔히 '동반자 작가'라고 불리는데, 동반자 작가란 사회주의에 심정적으로 동조하면서도 함께 행동하는 것을 보류하는 입장에 있는 작가를 말합니다. 이 작품에서도 채만식은 은연히 사회주의자를 긍정하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러한 동반자 작가로서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또한 채만식의 이러한 풍자적 기법은 일제의 가혹한 검열을 피하면서도 일제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잃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